2008. 8. 29. 12:51

Charles Mingus

Charles Min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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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2학년 때, 신주쿠 가부키초에 있는 별 신통치 않은 레스토랑에서 철야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밤 열 시에서 새벽 다섯 시까지, 환기도 잘 안되는 실내에서 일을 하다가 마지막 전철을 놓친 술주정뱅이와 함께 첫 전철을 타고 미타카에 있는 자취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초가을에 시작하여 초봄까지 일했다. 그래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늘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그 겨울은 춥고 고독하였으며, 신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 레스토랑 근처에 란 이름의 조그만 재즈 카페가 있었다. '직립 원인'. 물론 찰스 밍거스의 앨범 타이틀에서 따온 이름이다. 재즈 팬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긴 이름을 다 기억할리 없다. 그 카페는 비교적 밤늦게까지 문이 열려 있어서, 틈이 나면 들러 커피를 마시며 재즈를 들었다. 1970년대 전후의 신주쿠는 그 거리 특유의 활기로 가득했다. 그것은 난잡하고 폭력적이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진취적인 활기였다. 자기 주변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가슴 설레는 공기가 충만했다.
  그 재즈 카페에서 찰스 밍거스의 <직립 원인> 레코드를 실제로 틀어주었는데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LP <직립 원인>을 들을 때마다 그 카페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 시절 신주쿠 가부키초의 풍경이 내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계절은 겨울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LP <직립 원인>을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때 곡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진 못했고 별다른 흥분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이게 뭐야?' 하고 당황했을 뿐이었다. 특히 '포기 데이'(A Foggy Day)란 곡의 집요하고 시끌시끌한 유머 감각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레코드가 알게 모르게 나의 마음을 파먹을 들어갔다. 이전에는 그저 깔끔하지 못한 소리, 또는 엉터리 같은 진행으로  들렸었는데 점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고만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어떤 연주가자 연주하는 '포기 데이'를 들으면  반드시 밍거스 판의 '포기 데이'가 하나의 규범적인 형상으로 내 머리에 떠오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밍거스가 '포기 데이'란 곡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레스터 영은 옛날에 '그 곡을 불 때는 가사를 전부 외워서 노래하면서 불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래가 상대방의 마음에 가닿지 않는다고, 하지만 밍거스가 그 곡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를테면 레스터 영적 세계관의 완전한 전복이다. 밍거스가 제시하는 것은 원래의 '포기 데이'가 아니라 뒤바뀐 '포기 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밍거스가 연주하는 '포기 데이'는  레스터 영이 노래하는 노래와 똑같은 맥락에서 따스하고 시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와닿는다. 눈물도 피도 있다. 밍거스의 음악을 통하여 뒤바뀐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신인지도 모를 일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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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ie Hancock

Herbie Hanc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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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의 "농밀했던" 재즈계에서 "처녀항해Maiden Voyage"의 스마트한 앨범 자킷과 미래 지향적이며 청신한 사운드는 젊은 재즈 팬들의 마음에 선명한 각인을 남겼다. 마치 오랫동안 꽉 닫혀 있었던 집의 창문을 누군가의 손이 홀짝 열어젖힌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핸콕은 이후 재즈의 최전방에서 활약했고, 때로는 시대를 리더하는 훌륭한 작품을 상당수 발표했는데, 발표 당시 이 LP가 우리들에게 선물했던 싱그러운 숨결을 넘어선 그 무엇이 거기에 있었던가 하면 막상 그렇지는 않는 듯하다. 그의 이름을 내세운 많은 레코드들이 선을 보였지만,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앨범은 솔직히 거의 없었다.
  핸콕은 제로에서 무엇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음악가는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유형의 음악가였다. 나름대로 미래 지향적이고 혁신적이기는 하되, 그렇다고 스스로 앞장서서 광원(光源)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인력권 속에 있을 때에는 마일스가 발산하는 강렬한 혁신성에 정면으로 호응하고 또 대로는 대항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선열한 연주를 했지만, 그 태양의 열량이 감소하면서 핸콕의 음악의 방향성도 점차 산만해졌다. 연주 자체의 질은 높아도 군데군데 틀에 틈이 생기고 손버릇만 신경에 거슬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다소 비판적으로 쓰기는 했으나, 블루 노트 시대의 발랄하고 스타일리쉬한 핸콕의 연주는 지금 들어도 전혀 퇴색하지 않았으니, 그가 융통성있는 감각과 재능을 지닌 일급 뮤지션이었음을 새삼 말해준다. 그에게는 아마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대였을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음악을 그대로 음으로 바꾸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때 음악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났을 것이다. "처녀 항해"를 들으면, 그런 낙원 같은 모습이 알알이 전해온다.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 오중주단에서는 중진인 마일스와 웨인 쇼터가 빠지고 젊은 프레디 허바드와 조지 콜맨이 참가했다. 이렇게 멤버만 바뀌었는데도, 이 리듬 트리오는 실로 느긋하고 가볍게 연주를 즐길 수 있었다. 음 하나하나에 부드러움과 환희와 자신감이 충만했다. 핸콕이나 다른 뮤지션들이나 모두 젊어, 잃을 것이 아직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미래는 그들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이 레코드를 들으면 당시의 재즈 카페의 풍경이 떠오른다. 결국,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 창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좀처럼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리기는 했는데, 그 안쪽에 벽이 또 버티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처녀 항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였다. 그들이 열어준 것은 진짜 창문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진자 공기였다. 간혹 그런 음악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처럼 우리들 마음속에서 언제가지고 빛을 잃지 않는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Herbie Hancock
Maiden Voyage


Date of Release Mar 17, 1965 (recording) inprint

Ron Carter - Bass
George Coleman - Sax (Tenor)
Herbie Hancock - Synthesizer, Piano, Keyboards, Vocals
Tony Williams - Drums
Freddie Hubbard - Trump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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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 Brown

Ray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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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브라운이 탁월한 테크닉과 재즈의 소울을 겸비한 위대한 베이시스트라는 것은 많은 재즈 팬과 평론가들이 인정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재즈를 듣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 "다들 레이 브라운이 위대하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위대하다는 거야?"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마치 기타를 치듯이 경쾌하게 베이스를 연주하는"(빌 크로우씨의 얘기) 초(超)하이테크 베이시스트들이 우글거리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레이 브라운의 사운드는 다소는 목가적으로 들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앰프의 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밥 시대에 베이시스트가 다른 악기의 음악에 뒤지지 않으려면 크고 굵은 소리를 내야만 했다. 그래서 브릿지를 높이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브릿지를 높이려면 손가락의 강인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복잡한 연주를 하기란 지난해진다. 그렇게 힘에 좌우되는 시대에 테크니션으로 일세를 풍미한 연주가가 오스카 페티포드이며 찰스 밍거스이며 레이 브라운이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 앰프와 녹음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코트 라파로가 베이스 연주의 개념을 크게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시류의 변화에 무관하게 지금도 반듯하게 성실한 작업을 고수하는 정통파 재즈 베이시스트의 연주를 들으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페티포드와 밍거스가 오래 전에 죽었으니, 지금은 레이 브라운이 그 대표 노릇을 한다. 만약 레이 브라운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들어보는 것이 좋으리라. "과연, 이것이 재즈 베이스 주자 본연의 연주로군"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레이 브라운은 연주할 때에 불필요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비지니스 애즈 유주얼"이라는 느낌으로 담담하게 연주할 뿐이다. 음 하고 감탄사가 새어나오는 기교적인 솔로도 있지만, 그는 테크닉의 진열대와 같은 과시성이 없다. 아주 은근하게, 연변이 좋은 사람이 세상사는 얘기를 하듯이, 은근히 굉장한 것을 제공한다. 베이스 연주는 말 그대로 기초적인 리듬을 새기면서 연주자들에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키는 데에 있다는 기본 개념이 그의 뼛속에까지 스며 있는 듯하다. 그 이외의 '양념'은 그에게는 "사소한 고객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서비스를 싱글벙글 즐기면서 제공한다. 그리하여 그의 연주를 들으면, 재즈를 재즈로 성립시키는 것이 덩어리가 되어 가슴속에 쌓인다. 위대하다기에 충분하다.
  레이 브라운을 듣고 싶다면, 역시 그가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을 당시의 연주가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스카 피터슨의 기타 트리오 시대의 연주가 가장 멋들어지지만, 컴템퍼러리 "Poll Winners" 시리즈는 녹음 상태가 좋아 듣기가 쉽다. 이 트리오에서 브라운의 연주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자유로운 양질의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음악은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상에 있다. 고뇌와 내적 성찰? 그런 것은 어디 다른 데나 가서 알아보세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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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9. 11:25

허비 맨(Herbie 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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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재즈 팬들 사이에서는 "성실하게 재즈를 추구한 50년대의 허비 맨은 들어줄 만한데, 60년대 후반에 들어서 성공을 거둔 후의 그의 음악은 너무 얄팍하다"는 평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허비 맨 하면 'Memphis Underground'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인지라, 그런 주류파의 의견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래리 코옐, 소니 샤록의 농후한 더블 기타, 야, 멋있습니다.

 플륫이란 악기는 잼 세션에 포함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혼 악기에 힘이 달리게 되고, 음역도 좁고, 애당초 "없더라도 별로 상관없는" 악기이다. 그래서 플륫을 전문으로 하는 뮤지션들은 재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음악적인 미끼 같은 것이 필요하다. 머리를 쓰지 않으면 밥을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륫 하나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으니 대단하지 않느냐"고 나 같은 사람은 순순히 인정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일까?

 허비 맨은 60년대 들어서, 라틴 음악과 보사노바로 질주하여 "Coming Home Baby"를 히트시켰고, 마침내는 대담하게 (당시로서는) 일렉트릭 록을 도입하여 "멤피스 언더그라운드"에 도달했다. 그동안에 아프리카 음악에서 일본의 아악(雅樂)에까지 탐욕적으로 손을 댔다.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던 것이다. "좋아, 상업주의 노선으로 밀고 나가보자!"고 결심한 지 반달 후에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만약 허비 맨이 60년대에 히트 앨범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면, 플륫은 클라리넷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악기가 되거나 재즈계의 다락방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비 맨은 화려하게 활약했던 덕분에 많은 젊은이들이 플륫이란 악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고, 한때 그것은 인기 악기로 군림하게 되었다. 나만 하더라도 플륫을 사서 학원에 배우러 다녔다. 영 신통치는 않았지만.

 "멤피스 언더그라운드"는 그렇다고 치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허비 맨의 앨범은 "Windows Opened"이다. 백은 비브라폰에 로이 에어즈, 베이스에 미로슬라프 비토우스, 기타에 소니 샤록, 드럼에 브루노 카 --- 이와 같은 당시의 레귤러 리듬 섹션이 강력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다. 참신하고 젊고 막무가내고, 거의 자기들끼리 노는 경지이다. 이들의 연주를 토대로 리더는 열심히 불어댄다. 허비 맨 자신의 연주 스타일은 딱히 새롭지 않지만, 그런 그룹 컨셉션을 주도하는 방식이 실로 자연스럽고 능숙하다.

 곡도 당시의 팝송이 아니라 웨인 쇼터와 찰스 트리버 같은 신주류파의 음악을 의욕적으로 다루었는데, 이게 또 꽤 들을 만하다. 특히 비토우스의 사운드는 지금 들어도 청신하고 파워풀하다. 리얼 재즈이든 커머셜 재즈이든,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들어서 기분좋고 신나는데, 나쁠 게 뭐가 있을까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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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rbie Mann - Memphis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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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크리스티(June Chri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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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 크리스티는 애니타 오데이나 크리스 코너와 나란히 1950년대에 활약한 스탄 켄턴 악단 출신의 여성 가수였다. 그녀는 일본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도시적이고 지적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가볍고 정묘하게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이른바 백인적인 노래를 구사했지만, '문체'는 조금씩 달랐으니, 그 점이 흥미롭다. 물론 그 문체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 싫고 좋음이 갈린다.
 

 무수한 크리스티의 레코드들 중에서 한 장을 고르라면, "Something Cool"의 완성도를 고려하더라도, 나는 주저없이 "Duet"(1950년 녹음)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이 레코드만큼은 신기하게도 몇 번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크리스티의 노래 솜씨도 빼어나지만, 그에 뒤질세라 스탄 켄턴의 피아노 반주 역시 빼어나다. 클래식 음악에 비유하면, 슈바르츠코프가 제럴드 무어의 반주로 슈베르트의 가곡을 노래하는 것처럼 깊은 맛이 있다. 두 사람의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과 그 얽힘이 그대로 소리가 되어 들려 온다. 솔로 피아노의 반주만으로 노래한 재즈 보컬은 그밖에도 몇 사람이 있고 --- 예를 들면 엘라와 엘리스 러킨스, 토니 베네트와 빌 에반스 --- 그들의 연주도 전혀 나쁘지는 않지만, 크리스티와 켄턴의 콤비네이션에 비하면 애당초 그 출발점의 깊이가 좀 다른 듯한 기분이 든다.
 
 크리스티의 다소 설명적인 프레이징을 켄턴의 피아노가 뒤에서 품안 깊숙이 받아들여, 거기에 한점 한점 살을 붙여나간다. 남성미가 넘치는 피아노이다. 달변가이면서도 그 내면은 과묵하고, 상념을 담으면서도 어떤 선 바깥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는다. 이 레코드가 녹음되었던 당시, 컨턴은 사십대 중반, 크리스티는 서른 살, 양쪽 다 남자와 여자로서 기름기가 오르기 시작한 때이다. 이 레코드에 수록된 아홉 곡의 발라드를 가만히 듣노라면, 당겼다가는 밀고 밀었다가는 당기는 남녀의 마음의 움직임이 온기와 함께 절절하게 전해온다. 크리스티와 컨턴이 당시 어떤 개인적인 관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기야 그런 것은 아무러면 어떠랴. 아무튼 거기에는 눈앞에 떠오르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고, 그런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에 또렷하고 깊게 남는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빈틈없는 연주라고 할지라도, 이야기가 없으면, 살과 피가 없으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나는 LP의 B면에 실려 있는 다섯 개의 곡을 잇따라 듣기를 좋아한다. 한밤에 혼자서 위스키 잔을 기울이면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Baby Baby All the Time"을 듣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끝내 시간은 흐르고, 모든 아름다운 마음도 언젠가는 재가 흩어지듯이 사라지고 무(無)가 된다. 우리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 --- 어떤 특별한 경우 --- 그것은 조용한 진동이 되어 공기 중에 남고, 모양을 바꾸어 어디에선가 은밀하게 이어져 갈 수도 있다. 준 크리스티의 목소리와 스탄 켄턴의 피아노에 귀를 기울이면, 어째서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아마 그것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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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티몬스(Bobby Ti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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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티몬스는 자기 명의의 신나는 피아노 트리오 앨범을 몇 장 가지고 있는데, 음악적인 스릴이란 점에서는 1960년을 전후하여 아트 블래키가 주재한 재즈 메신저스의 리듬 섹션을 담당했을 때의 연주가 단연 으뜸이다.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리더보다 반주를 맡았을 때에 보다 인상적인 연주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티몬스도 그런 연주가들 중의 한 명일 것이다. 재즈 메신저스 당시의 그는 아무런 주저없이 리 모건, 베니 골슨과 같은 동행 출신의 마음 맞는 젊은 동료들과 한껏 좋은 재즈를 들려주었다.


 재즈 메신저스를 떠난 티몬스는 한때 캐논볼 밴드에 들어가서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고, 펑키 재즈 전문 피아니스트로 그야말로 일세를 풍미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내건 트리오의 연주는 신나고 재미있긴 해도, 음악의 틀이 너무 꽉 짜여 있고 폭이 넓지 못한 탓에 듣다보면 진력이 나기도 한다. 당사자도 그런 한계를 느꼈는지, 펑키 붐이 지나가고 빌 에반스와 핸콕, 타이너 등의 신세대 피아니스트가 재즈의 중추를 담당하게 되고부터는 점차 알코올에 빠져들었다. 연주는 거칠어지고 급기야 마지막에는 한낱 촌스럽고 평범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말았다.


 뮤지션이 행복하게 음악적인 천수를 누리는 것은 --- 예를 들면 엘링턴이나 루이 암스트롱 --- 멋진 일이다. 그러나 작업은 고되고 변화도 무쌍한 재즈의 세계에서 그와 같은 예는 오히려 드문 경우일 것이다. 그들의 음악은 짧게 빛났고 그들의 인생은 혹독한 장애물로 얼룩져 있다. 그렇게 몇몇 항성(恒性)의 확고한 빛과 유성(流星)의 순간적이고 위태로운 빛이 뒤섞여 전체적인 재즈의 지도를 선명하게 그리고 매혹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아무튼 보비 티몬스라는 피아니스트는 한정된 몇 년 동안의 눈부신 활약으로 재즈 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그것은 물론 찬란한 하나의 성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성취를 이룬 삶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말이다.


 티몬스는 작곡가로서도 탁월했다. 그가 작곡한 "Dis Here", "Dat Dere", "Moanin"은 거뭇거뭇 펑키하고, 동료인 베니 골슨이 작곡한 많은 곡이 우수를 띠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불가사의한 멋을 지닌 건조한 유머 감각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곡은 "So Tired"이다. 아트 블래키의 앨범 "Night in Tunisia"에 수록되어 있는 이 곡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티몬스의 솔로는 적당히 억제가 살아 있어, 아삭아삭하고 상큼하다.


 아오야마(靑山)의 '바 라디오'에는 "So Tired"란 이름의 오리지널 칵테일이 있는데, 물론 이 곡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내용물은 진에 위스키와 기네스 맥주. 하루를 마감하는 지친 저녁 나절, 카운터에서 마시는 이 칵테일이 부드럽게 나를 걷어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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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트 콜맨(Ornette Col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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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990년 초였을 것이다. 오네트 콜맨이 자신의 아들도 멤버 중의 한 명인 밴드를 이끌고 일본에 와서 요미우리 랜드의 야외 콘서트에 출현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 날 일요일 오후에 맥주를 마시면서 느긋한 기분으로 그 연주를 듣고, "오네트 콜맨의 음악이 이렇게도 순수하고 유머 감각에 충만했어군"하고 놀람과 동시에 다소 맥이 빠지고 말았다. 나는 (그리고 아마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리라) 오네트 콜맨의 음악이 도전적이고 지적이고 기본적으로 난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이가 들었으니 모서리가 깎여나가 둥글둥글해진 탓도 있을 것이고, 그가 전위적인 연주가로 활약한 60년대 비하면 세상이 많이 바뀐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은 그 근본이 확 바뀌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오네트 콜맨의 음악은 옛날부터 "순수하고 유머 감각에 충만했다"(또는 원래 그러기를 원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다시 옛 레코드를 꺼내 들어보니, 그 음악은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으로 내 귀를 울렸다.
 과거 베트남 전쟁이 한참 치열했을 때, 신주쿠 언저리의 담배 연기 자욱한 재즈 카페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숨을 죽이고 새카만 JBL 유니트에서 빵빵 쏟아져 나오는 오네트 콜맨의 음악을 들었다. 마치 암호와 같은 음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듯이, 당시 오네트 콜맨을 듣는 행위야말로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를 읽거나 파졸리니의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특수한 감촉이었다. 대상과의 접촉 그 자체에 이미 의미가 내포되어 잇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뜨겁고 첨단적인 시대는 지나갔고 재즈의 상황도 크게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더불어 사람들이 오네트 콜맨의 음악에 열심히 귀 기울이는 일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차라리 그것은 내게나 오네트 콜맨에게나, 솔직하게 말해서,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들은 시대의 미신적인 믿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저 거기에 있는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맑게 개인 여름날 오후에, 90년대의 건강한 바람 속에서 그의 현재의 음악을 듣다보니, 나는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네트의 작품 중에서는 명곡 "Lonely Woman"이 들어있는 "The Shape of Jazz to Come"(Atlantic)이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가장 모양새가 정돈되어 있고 또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 개인적으로는 1962년에 녹음된 "Town Hall Concert"(ESP)를 좋아한다. 이 연주는 군데군데 다소 억지스럽고 텐션도 상당히 높게 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굵은 흐름 하나가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잇따라 흘러 넘치는 오네트 콜맨 특유의 음 덩어리 속에서, 나는 그 혁신적인 --- 동시에 내츄럴한 --- 찰리 파커의 영혼의 그림자 같은 것을 인식하고 흐뭇해한다. 그밖에도 파커 스타일을 신봉하는 연주가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에게서는 별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2008. 8. 29. 11:09

쟝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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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렌치 키스"란 영화를 좋아한다. 케빈 클라인이 불어의 억양이 섞인 영어로 얘기하는 수상한 프랑스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는 옥신각신 끝에 전형적인 미국 아가씨 맥 라이언과 맺어진다. 영화는 행복하게 끝이 나고 크레디트 타이틀이 죽 나열되면서 그 배경에 케빈 클라인이 코맹맹이 소리로 부르는 "La mer"가 흐른다(불어로). 침대에서 아마도 섹스를 한 후, 흠흠흠흠 하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거, "Beyond the Sea"이지. 가사가 프랑스어로도 번역됐네."  옆에서 맥 라이언이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있지, 이건 원래 프랑스 노래라구." 케빈 클라인이 항의한다. "거짓말. 그거, 보비 달린 노래라구.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맥 라이언은 물러서지 않는다.
미국의 극장에서 보았는데, 그 목소리뿐인 마지막 대화가 익살스럽고 멋스러워, 다른 손님들은 모두 돌아가고 없는데도 나 혼자 남아 엔딩 크레디트까지 보고 말았다. 그리고 장고 라인하르트가 연주하는 "라 메르"가 무지무지 듣고 싶어졌다.

 

 물론 케빈 클라인의 주장이 옳다. "라 메르"는 원래 프랑스 노래이고 1938년 샤를 트레네가 작곡했다. 보비 달린이 "Beyond the Sea"란 제목으로 노래하여 미국에서 대히트를 친 것은 1950년대 중반이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조지 벤슨도 노래하여 유행했다. 아름다운 선율을 지닌 멋진 곡이라서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을 명콤비 장고 라인하르트와 스테판 그라펠리의 연주로 들으면 "이제는 아무 것도 필요없어"라는 기분이 든다. 그 정도로 차밍하고 인상적인 연주이다. 라인하르트와 그라펠리가 함께 연주한 곡들은 어느 것을 들어도 불평의 여지가 없지만, "라 메르"는 처음 들었을 때 --- 대학생이었다 ---부터 유독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앨범 "Djangology"는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한 것이 아니라, 장고와 그라펠리가 1949년에 로마의 한 나이트 클럽에 출연할 당시, 어떤 이탈리아인 재즈 팬이 개인적으로 세션 자리를 마련하여 거기에서 녹음한 것이다. 그래서 음질은 그다지 칭찬 받을만한 것이 못 되지만, 그런 부정적 요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피커 저편에서 당시 유럽 땅에 깔려 있었던 공기 같은 것이 직접 연결되어 온 방을 가득 채운다. 이 박진감은 음의 좋고 나쁨과는 무관하다고 할까, 점차 "이 음악에는 이 정도의 음질이 마침 적당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라면?


 정말 오리지널한 음악만이 지니는, 곧바르고 뜨거운 기백에 덧붙여 "지금 여기에서 살면서 이렇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자유의 기쁨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소리로 결정(結晶)을 이룬다. 라인하르트는 그밖에도 탁월한 연주를 많이 남겼지만, "장골로지"에서 장고와 그라펠리가 보여준 물 한방울 새지 않을 긴밀성과 적당히 남겨둔 컬래버레이션은 언제 들어도 황홀감에 젖기에 충분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2008. 8. 29. 10:45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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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얘기다. 고등학교 때 돈을 모아서 앨범 "Song For My Farther"를 샀다. 여자 친구와 같이 코베(神戶) 모토마치(元町)에 있었던 일본 악기 가게에 들러서 샀다. 제작사의 띠를 두른 묵직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새 수입판이었다. 레코드에 인쇄되어 있는 블루 레코드의 주소는 아직도 뉴욕 61번가 41번지였다.


  그녀는 딱히 재즈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재킷이 멋지네"라고 말했다. 계절은 가을이었고, 하늘은 맑았고, 구름은 눈을 잔뜩 부릅떠야 보일 만큼 높이 떠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런 것들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그 레코드를 산 일이 인상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당시 블루 노트 레코드는 일본에서의 레코드 복제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입 음반밖에 입수할 수 없었다. 가격은 2800엔(1달러는 360엔이었다)이었는데, 커피 한 잔을 60엔에 마실 수 있는 시대였으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고등학생으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정성껏 들었다. 축음기 나팔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빅터 레코드사의 개처럼, 말 그대로 음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 친구보다 더 소중하게, 그 정도까지는 안 되어도,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하게 다뤘다. 손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요리조리 바라보기도 하면서. 내게 한 장의 레코드는 보물이었으며 다른 세계로 가는 귀중한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음악의 내용이 훌륭해도 요즘 사람들은 CD의 플라스틱 케이스를 껴안지는 않을 것이다(껴안을려나?)
 
 타이틀 넘버인 "Song For My Farther"는 불사가의한 존재감을 지닌 곡이다. 리듬의 바탕은 보사노바인데, 묵직하고 끈적하고 어두운 색 필터가 끼여 있어, 당시 유행했던 스탄 게츠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보사노바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아버지는 포르투칼 출신의 흑인이었다. 호레이스가 어렸을 때, 곧잘 동네 사람들은 악기를 들고 자기들끼리 모여 세션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이 곡을 썼다고 한다. 그런 정겨운 뒷골목 냄새가 음악 구서구석에 푸근하게 배어 있다. 하드 밥도 아니고 펑키도 아닌 호레이스 실버의 개인적인 세계가 선명하게, 다소는 마술적으로 전개된다. 멜로디는 뚝뚝 끊어지지만, 속은 꽤 깊다.
 
  젊은 날의 조 헨더슨이 연주하는 테너 색소폰의 톤도 찬찬히 귀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 배가 고플 때 들으면 뱃속이 꽉 차오를 듯한 사운드이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하게 이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울려놓았는데(지금은 미발표곡을 포함한 CD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푸근한 소리에 나는 LP를 선택하고 만다), 그런데도 질리지가 않으니 참 대단하다. 지금도 레코드 위에 바늘을 내려놓고, "송 포 마이 파더"의 저 독특한 인트로가 시작되면 나는 가슴이 춤을 춘다. 스틸리 댄은 "Rikki Don't Lose That Number"란 곡에 이 인트로를 인용했는데, 그 쪽을 들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실로.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2008. 8. 29. 10:43

토니 베네트(Tony Ben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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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포스트 프랭크 시나트라'의 자리에 오를 것인가?

많은 남성 가수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패권을 다투었다.

보비 달린, 페리 코모, 버디 그레코, 빅 데이먼, 조니 마티스 --- 그러나 모두들 어중간하여, 대형 정통파 남자가수로는 대성하지 못했다. 세월은 흘렀고, 토니 베네트만 거센 파도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은 튼튼한 창고처럼 혼자 남았다. 시나트라와는 개성이나 맛이 상당히 달랐지만, 아무튼 이 사람만큼 실력있는 사내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기야 시나트라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았고 죽기 직전까지 현역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포스트 시나트라란 자리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고, 거인이 죽은 후에는 시나트라적인 것의 수요 자체도 소멸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토니 베네트는 '최후의 대형 정통파 남자가수'라는 귀중한 존재가 된 셈이다.
 

 베네트는 재즈에 조예가 깊었고, 시나트라가 거의 빅 밴드하고만 일한데 반해, 소편성의 재즈 캄보와 일하기를 즐겼다. 고상하고 상큼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국 출신의 랄프 샤론이 마음에 쏙 들어, 1954년부터 마지막까지 피아노 반주자겸 편곡자로 같이 일했다(일시적인 중단은 있었지만). 그밖에도 탁월한 뮤지션들과 함께 무수히 공연했고, 재즈향이 넘치는 앨범도 다수 남겼다. 시나트라가 빅 밴드 시대의 총아였다면, 베네트는 밥의 세례를 받은 캄보 세대의 가수였다.


  그러나 시나트라는 베네트보다 한결 더 재즈의 진수에 가까웠다. 베네트의 노래에서 광기나 자기 모순, 좌절, 악의, 집착, 붕괴의 그림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아름답고 성량은 풍부하고, 프레이징은 지나칠 정도로 명료하고, 있는 그대로의 정감을 담아 노래한다. 그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따진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뭐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니까. 애당초 그가 재즈 가수인지 아닌지 따위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별로 상관없는 일일 테니까.
 

 클럽에서 토니 베네트의 라이브를 직접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입을 모아 멋진 체험이었다고 말한다. 인품이며 무대 매너며 노래며 모두 정말 멋 있었다고. 아마 사실이 그랬을 것이다. 베네트의 자연아적이며 탄력 있는 노래는 그가 아니면 인도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온기 어린 목소리는 그가 아니면 녹여줄 수 없는 온도로 우리를 녹여준다. 그것은 가수로서 실로 행복한 재능이며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택하라면, 나는 시나트라가 지닌 어떤 종류의 질곡을 택할 것이다. 그것은 토니 베네트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의 질곡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굳이 베네트의 노래를 배제하고, 피아노 반주자인 랄프 샤론이 토니 베니트의 노래를 정규 트리오로 연주한 앨범을 추천했다. 이 앨범을 들으면, 클럽에서 베네트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잠시 쉬는 막간에 샤론이 들려주는 피아노의 산뜻함과 함께 푸근한 분위기가 느껴져 나는 상당히 기분이 좋다. 베네트가 없어도 베네트성(性)이 꽤 높다. 물론 "I Left My Heart In San Freancisco" 도 들어 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Bill Evans and Tony Bennett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


Date of Release Jun 10, 1975 - Jun 13, 1975 (recording) in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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