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30. 11:15

책을 쓰거나 쓰게하거나.....

당신의 책을 가져라10점
그동안 일본에서 나온 책을 비롯해서 수많은 책쓰기에 관한 책을 읽어 왔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불혹을 넘기기 전까지는 반드시 책을 한권쓴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불혹을 넘긴 지금도 언제 책한권을 써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그렇게도 한번 써보고 싶었던 나에게 송숙희님의 이 책은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만약 내 책이 세상에 나온다면 가장 먼저 감사해야할 분이 이 책의 저자인 송숙희 님이 아닐까 싶다. 정말이지 이 분은 책을 쓰거나 쓰게하는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진 분 같다.
http://hownext.tistory.com2008-08-30T02:15:15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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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30. 09:41

일본에서 본 '호시노JAPAN의 침몰'

8월 24일 일본 야구대표팀의 노메달이 확정되자 일본 언론은 하나같이 '차기 대표팀 감독 인재난'을 보도했다. 일본은 이미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비에 들어갔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은 한국의 몫이었다. ‘도하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국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역대 국제무대 최고의 성적을 내며 세계야구의 별이 됐다. 반대로 일본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의 영광이 불과 2년 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부진과 악수(惡手)을 거듭하며 ‘노메달’ 수모를 겪었다. <스포츠춘추>가 영원한 라이벌 한-일전 2경기를 중심으로 '호시노JAPAN'의 한계와 문제점을 일본 현지에서 취재했다. 내년 WBC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일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옆나라의 불행을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다.

‘메이저리거를 제외하고 최상의 선수들로 구성됐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금메달을 자신할 수 있지 않을까.’ 8월 12일 일본의 스포츠라이터 이세 쇼와 씨에게 베이징올림픽 일본대표팀에 대해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그랬다. 이세 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보다 센트럴, 퍼시픽 양대 리그가 적극적으로 협조해 괜찮은 선수단을 구성했다’며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의 뒤를 이어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일본야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어디 이세 씨뿐이었겠는가. 호시노 감독이 이끄는 이른 바 ‘호시노JAPAN’를 향한 일본인들의 기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럴 만도 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나가시마JAPAN’이 동메달을 차지하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드림팀이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초대 우승컵을 거머쥐며 일본야구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만약 호시노 감독이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라도 한다면 일본야구는 명실 공히 ‘아시아 제일’을 넘어‘세계 제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예선 한-일전, 일본야구의 불안한 징후

“역시 한국야구는 대단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일본이 2번이나 진 게 우연이 아니다.” “김광현과 이대호는 대단히 인상적인 선수들이다.” 8월 17일 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이하 고시엔대회) 오사카 토인고와 요코하마고의 준결승전이 열리는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시엔구장을 찾았을 때 일본 기자들이 늘어놓은 감탄사들이다.

전날 중국 베이징 우커송야구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일본의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예선 풀리그 4차전 경기를 두고 한 말들이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숙명의 라이벌 일본을 5-3으로 꺾고 4연승을 달렸다. 반면 ‘한국보다 한수 위’라고 자부하던 일본은 쿠바에 이어 한국에도 패하며 4강 진출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일본 기자들의 감탄사는 덕담 수준이었다. 그들 가운데 확실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정작 일본 기자들은 한국전 패인을 실력 외적인, 그러니까 일본 선수들의 자만심과 호시노 감독의 한 박자 느린 투수교체에서 찾고 있었다.

“김광현이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공략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투수는 아니었다. 일본타자들이 자만심을 버리고 공 1개라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그렇듯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투수들도 실투가 너무 많았다. 와다 쓰요시가 이대호에게 맞은 2점 홈런은 배팅볼에 가까웠다.” 아사히신문의 한 기자는 그렇게 운을 뗀 뒤 호시노 감독의 투수교체 타이밍을 두고 불만을 드러냈다.

“7회 김동주에게 볼넷을 내줬을 때 와다를 교체했으면 어땠을까. 결과론이지만 원래 공식대로 7, 8, 9회 가와카미 겐신이나 후지카와 규지, 이와세 히토키, 우에하라 고지가 차례로 나왔다면 좋지 않았을까. 단기전에선 투수교체의 맥을 잘 짚어야하는데 일본 코칭스태프가 그 점을 간과한 게 아닌가 싶다. 이와세가 김현수에게 역전타를 맞은 건 도리 없는 일이고.”

그러나 경기를 차분히 살펴보면 김현수의 안타는 ‘도리 없다’는 말로 끝내기엔 무엇인가 빠져있다. 모든 일본 언론이 같은 악보를 바라보는 합창단원들처럼 “투수교체 타이밍이 주요 패인”이라고 지적하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왜냐? 그렇게 단정하고 나면 이면에 숨어 있는 일본야구계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김현수의 결승타 장면을 돌아보자. 고시엔구장에서 만난 일본의 한 야구해설가는 “김현수의 안타 때 일본 수비진의 중계플레이는 아쉬움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현수의 타구를 중견수 아오키 노리치카가 2루수 아라키 마사히로에게 잘 중계했다. 그런데 아라키가 순간 판단착오로 앞에서 1루수 아라이 다카히로가 3루로 던지라고 손짓을 했는데도 홈으로 던지고 말았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어쩌면 결과론에 지나지 않을지 몰랐다. 당시 2루 주자는 발이 느린 김동주였다. 아라키 같은 경험 많은 수비수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그것이 문제였다. 일본 수비진들은 한국야구의 기동력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한국선수들 가운데 발 빠른 타자가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실제로 이들이 어떤 플레이를 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김동주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은 전보다 한 템포 빠르게 주루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은 젊고 힘있는 선수들로 세대교체해 파워피칭과 기동력 야구에 성공한 것 같다”며 “아직 일본의 메달색깔이 결정된 게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늙은 일본이 남은 경기를 한국전처럼 대책없이 치른다면 호시노JAPAN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세계 제일’을 꿈꾼 일본야구

일본야구는 2006년 WBC가 끝나마자마자 베이징올림픽 준비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첫발은 2007년 1월 25일 프로·아마추어 합동의 일본대표팀 편성위원회에서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호시노 센이치 전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선임하면서부터였다. 호시노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금메달 이외엔 다른 건 생각하지 않는다”며 “반드시 금메달로 일본야구팬들의 성원에 화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의 유명 야구칼럼니스트 하세가와 쇼이치 씨. 그는 일본야구의 올림픽 참패를 "(일본야구의)총제적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결과"라고 평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여기서 몇 가지 돌아볼 게 있다. ‘어째서 일본은 호시노를 선택했는가’이다. 호시노 감독은 과거 주니치 드래건스와 한신 타이거즈 감독 재임 시 일본시리즈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며 ‘단기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령탑’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일본이 호시노를 선택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야구칼럼니스트 하세가와 쇼이치 씨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가 워낙 거물들이라 그들의 뒤를 잇는 감독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며 “편성위원회가 그나마 호시노를 나가시마와 오의 뒤를 이을 중량감 있는 야구인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아테네올림픽 당시 나가시마 감독이 ‘지나치게 감(感)에 의존해 작전을 구사했다’는 지적이 많아 이번엔 데이터에 능통한 호시노 감독을 선임하자는 의견이 있었다”며 이것이 호시노JAPAN이 출범하게 된 주요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다 호시노 본인이 대표팀 감독을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호시노 감독은 일본 지상파 야구해설가로 나왔다. 쿠바야구를 가리켜 “단순히 아마추어 야구 최강일 뿐이지 올림픽에 일본 프로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당시 나가시마JAPAN이 쿠바를 이기며 이 같은 예언이 적중하자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됐다.

당시 호시노 감독은 마지막 중계에서 “소년의 마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며 우회적으로 차기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그리고 결국 바람을 이뤘다.

그렇다면 일본야구가 일찌감치 호시노JAPAN를 출범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총력지원을 약속하며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그토록 독려한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의 시계를 74년 전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1934년 요미우리신문의 사주 쇼리키 마쓰타로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이 참가한 미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당시 프로팀이 전무했던 일본야구계는 아마추어 선수들 가운데 전일본 대표선수를 뽑아 메이저리그 선발팀과 대전을 벌이도록 했다. 이 팀이 일본 국가대표 야구팀의 실질적인 효시이자 최초의 일본야구 ‘드림팀’이다.

훗날 도쿄야구클럽(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창단하며 직업야구연맹(현 NPB(일본야구기구))총재를 맡는 등 ‘일본프로야구의 아버지’로 통하는 쇼리키는 초청경기를 통해 일본야구의 우수성을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가능하다면 ‘야구의 본고장’미국을 꺾고 ‘일본야구의 세계 제일’을 달성했으면 했다.

쇼리키는 이때의 다짐을 유훈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군)헌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거인군은 미국야구를 따라잡고 추월하라’문구가 그것이다.

'호시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대표 우에하라 고지가 일본 올림픽 노메달과 관련해 국민에게 사죄했다'는 기사를 오사카의 한 시민이 읽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야구에서만 ‘극미(克美)’을 외쳤으면 모르지만 쇼리키는 전쟁을 통한 ‘극미’에 더 열심이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쇼리키는 유력지 요미우리신문이 일본군부의 나팔수가 되는데 기꺼이 협조했다.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무고한 세계인들의 죽음을 외면한 그가 전후(戰後)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건 당연했다. 그러나 쇼리키는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뒤 친미주의자로 돌변했다.

그렇다고 쇼리키의 야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극미’와 ‘일본의 세계 제일’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야망의 도구는 역시 야구였다. 196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쇼리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노력했고 그가 숨진 뒤 일본야구계는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제정해 그의 뜻을 받들고 있다.

한때 쇼리키의 꿈이 이뤄지는가 했다. 2006년 일본이 WBC 초대 우승국에 올랐을 때다. 그러나 WBC는 진정한 세계 제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주도로 급조된 대회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올림픽 금메달을 통해 진정한 ‘세계 제일’을 달성하길 바랐고 WBC가 끝나자마자 베이징올림픽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세계 제일’이 되고자하는 일본야구의 야망을 쇼리키 한 개인의 야심과 연결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야구가 일본야구의 희망과는 별개로 쇼리키 한 개인의 야심이 이뤄지는 걸 가만히 지켜봐선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과거 한국인 학살에 앞장섰던 군국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932년 간토(관동)대지진 때 경시청 간부였던 쇼리키는 ‘조선인 폭동 소문’을 유포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경찰과 자경단이 휘두른 죽창에 희생되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출세에 이용했다. 훗날 쇼리키는 이때의 소문이 허위였음을 인정했지만 결코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한 재일동포는 “그런 쇼리키가 만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를 날마다 한국 안방에서 지켜보고 응원한다는 소식을 듣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며 “아직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자신들을 철지난 ‘거인군(巨人軍)’으로 부르며 군국주의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구단”이라고 강조했다.

일본프로야구를 주무르는 ‘신군국주의자’ 요미우리 와다나베 쓰네오 회장이 호시노JAPAN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 자처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게 일본 지식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준결승 한-일전, '8회의 사나이' 이승엽이 끝내다

8월 22일 한국과 일본의 야구 준결승전. 평일 오전이라 일본의 관심은 한국처럼 높지 않았다. 대규모 거리응원은 고사하고 주요건물에 설치된 대형화면에서도 야구는 방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깊게 살피면 역시 야구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일본의 각 가정과 가게의 TV는 한-일전에 고정돼 있었고 일본 직장인들의 관심사도 온통 야구뿐이었다.

8월 22일 도쿄 신주쿠. 야구 준결승 한-일전을 일본 야구팬들이 지켜보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일본올림픽유치위원회는 ‘2016년 도쿄올림픽 유치’ 대국민 홍보를 위해 도쿄 신주쿠의 한 거리에 베이징올림픽 생중계 부스 2곳을 설치했다. 2대의 TV 브라운관과 30여석 규모의 간이의자를 마련해 행인들이 잠시 자리에 앉아 경기를 관전하도록 했다. 전날까지 이곳을 이용하는 이들은 5~6명의 노숙자과 노인들이 전부였다. 올림픽유치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이용률이 턱없이 낮았다.

그러나 한-일전은 달랐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이미 좌석은 찼고 행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일본이 먼저 2점을 따내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덩달아 이날 일본 선발 스기우치 도시야의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다. 역대 한국은 제구가 뛰어난 일본 왼손 선발투수를 상대로 고전했다.

이러다가 전날 일본 방송사에서 하루 종일 외치던 ‘일본의 WBC 영광’이 재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WBC 당시 일본은 한국에 2번이나 졌지만 준결승에서 승리해 결승전까지 오르고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쥔 바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고 있는 한국 벤치보다 이기고 있는 일본 벤치가 더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호시노 감독은 한눈에도 안절부절하는 표정이었고 선수들은 뭔가 쫓기는 이들처럼 서두르게 마련이었다. 큰 경기에서 긴장은 가장 무서운 적이 아닌가.

징후는 현실이 됐다. 잘 던지던 스기우치가 4회 1점을 내주자 호시노 감독은 즉각 가와카미 로 투수교체를 시도한 뒤 매회 투수를 갈기 시작했다. 7회 후지카와 규지를 4번째 투수로 마운드 위로 올려 보냈지만 8회 이와세, 9회 우에하라 고지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산이었다. 한국 이진영이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마무리 후지카와를 상대로 동점타를 때려낸 것이다. 후지카와의 제구에 문제가 있었다곤 하지만 원래 투수란 완벽하지 않다. 실투를 놓치지 않아야하는 타자로서의 이진영이 더 뛰어났을 뿐이다.

터닝포인트는 8회였다. 함께 경기를 관전하던 이동훈 PSN 대표는 8회가 시작하자 “이승엽 타임이 왔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2004년 이승엽이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뛸 때 전담통역이었던 이 대표는 “잘 지켜보라”며 목에 힘을 줬다.

일본에서도 이승엽은 ‘8회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0-0으로 맞선 8회 2사 2, 3루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를 상대로 좌중간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렸고 2006년 WBC 아시아예선에서 1-2로 뒤진 8회 역전 2점 홈런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와 지금은 차이가 컸다. 올시즌 이승엽은 부상 후유증과 컨디션 난조로 줄곧 요미우리 2군에 있어야 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이 경기 전까지 부진으로 일관했다. 호시노 감독도 기적이 일어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8월 20일 미국전 타이브레이크에서 혼자 4점을 주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이와세를 계속 기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국전은 일본의 고의 패배가 아닌가.” 당시 일부에서 일본이 4강전 한국과 상대하기 위해 미국에 고의로 진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고의패배를 단정하기엔 혐의가 뚜렷하지 않다. 당시 일본야구계는 상대가 어느 팀이든 미국전에서 반드시 이겨 상승세를 타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호시노 감독도 미국전에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가와카미, 이와세 등을 등판시켰다. 일본에서 만난 일본 취재진들은 "당시 다르빗슈와 우에하라 등 몇몇 투수들의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며 "팀 분위기를 중시하고 과거 '일본이 프로선수를 총동원하면 아마추어 최강 쿠바쯤은 문제도 없다'고 주장한 호시노 감독이 굳이 준결승에서 한국을 상대하려고 고의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기야 준결승에서 껄끄러운 쿠바 대신 한국을 상대하고 싶은 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일본이 미국보다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와세가 아니라 어떤 투수가 올라왔어도 일본의 성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 타자들은 무력했고 준비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와세는 일본야구의 참패를 상징하는 이미지이지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이승엽에게 맞은 2점 홈런은 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본 배터리의 공배합이 이승엽의 예측에 제대로 걸렸다. 바깥쪽 유인구로 2스트라이크를 잡은 야노 아키히로는 이와세에게 몸쪽 공을 요구했다. 전형적인 이승엽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이승엽이 그들보다 더 뛰어났다. 이승엽의 홈런 한방으로 '세계 제일항'을 향해 떠났던 호시노JAPAN의 항해는 중단됐다.

호시노JAPAN의 총체적 문제점

호시노JAPAN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미국에 패하며 노메달 신세가 됐다. 이에 일본 언론은 “참패” “완패” “참사”라는 단어를 쓰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야구팬들의 충격은 말할 나위 없었다. 주요 야구 사이트에는 일본 대표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고 코미디프로그램에서는 호시노 감독을 조롱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대개의 야구평론가와 해설가를 비롯한 야구인들은 호시노JAPAN의 참패 원인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본 NHK방송 해설자로 베이징 현지에 있던 노무라 겐지로나 특별 게스트로 역시 현장에 있던 후루타 아쓰야는 “대표팀에 부상선수가 너무 많았다”라든가 “아마추어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이 제멋대로였다” 혹은 “투수교체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라는 식의 누구나 할 수 있는 면피성 발언으로 일관해 일본 야구팬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특히나 후루타는 준결승 한-일전에서 이용규가 9회 마지막 타구를 잡고 그라운드에 엎드려 감격해하자 “금메달을 딴 것도 아닌데 저렇게 오버할 필요가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내며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다.

어쩌면 이 장면이 일본야구의 한계이자 문제를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일본의 스포츠주간지 <넘버>와 <야큐소슈>, <베이스볼타임>등의 주요필진인 하세가와 쇼이치 씨는 “일본야구계와 스포츠언론은 호시노JAPAN의 출범 때부터 '응원'이란 명목 아래 지켜만 볼뿐 감시나 비판은 전혀 하지 않았다”며 “호시노 감독이 간과한 부분을 보충할 기회를 결국 놓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일본 선수명단을 보라. 총액 46억 엔(약 460억 원) 군단이지만 죄다 정규시즌용 선수들이다. 시즌 성적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단기전에 강한 선수들도 선발했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겠나.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이름값으로 선수선발을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론이나 야구계에서 이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검증해야하는데 그냥 호시노 감독이 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한국은 평가전에서 부진했던 투수(임태훈)를 교체하는 등 끝까지 선수선발을 고민하지 않았나. 듣자니 임태훈이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구단(두산) 소속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호시노 감독은 퍼시픽리그와의 평가전 때 형편없는 투구를 선보인 가와카미를 계속 끌고 갔다. 과거 주니치에서 자기가 데리고 있던 선수라고 챙긴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세가와 씨의 비판과 자성은 유효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호시노 감독도 이름값으로 사령탑이 된 게 아닌가.

일본의 ‘데이터 야구’도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는 게 일본야구계의 솔직한 고백이다. 하세가와 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했던 일본 코치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코치들은 “아테네올림픽을 통해 반성할 게 무엇인가”라는 하세가와 씨의 질문에 “선수선발 시 지나치게 데이터에 의존했다. 역시 국제대회용 선수는 임기응변이 뛰어난 선수들”이라고 대답했다.

하세가와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노JAPAN은 임기응변이 뛰어난 선수를 선발하기보다 올시즌 성적과 연봉을 토대로 뽑았다”며 “솔직하게 말해 요즘 선수들은 스코어러(전력분석원)들이 자료를 물어다주지 않으면 다들 굶어 죽을 아기새들”이라고 인상을 구겼다. 하세가와 씨는 “정작 데이터를 유용하게 써야할 곳에서 쓰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트라이크존을 뜻하는 말이었다.

취재 중 만난 센트럴리그 모 구단의 스코어러는 “한국, 미국, 쿠바, 대만 등 주요국의 데이터는 엄청나게 수집한 것으로 안다”면서도 “정작 아마추어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 성향은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연구하지 않았다”고 호시노JAPAN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올림픽 기간 내내 일본 투수들은 심판의 볼판정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일쑤였다. 이는 되레 역효과로 작용해 일본은 대회 기간 내내 심판판정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받았다.

일본의 주포였던 아라이 다카히로. 부상으로 시달렸지만 예선 한국전에서 2점 홈런을 쳤다. 그의 홈런엔 기구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일본야구계가 꼽는 문제점 가운데 타격도 예외가 아니다. 그 가운데  ‘거포 부재’가 대표적이다. “단기전은 한방으로 승부가 결정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일본 대표팀은 강타자는 많은데 한국의 이승엽처럼 결정적일 때 한방을 치는 거포가 없었다. 올림픽만이 아니다.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가 메이저리그로 떠난 뒤 일본프로야구는 '거포 부재'로 시달리고 있다. 이 문제는 일본야구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할 시급한 과제다.” 일본의 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보루> 야나모토 모토하루 편집부국장의 말이다.

현재 일본프로야구는 오른손 거포를 찾아 전세계를 헤매고 있다. 일본 센트럴리그 2개 구단에서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국내 모 선수를 두고 영입전을 펼칠 태세다.

일본야구의 롤모델, 한국?

전날 노메달이 확정된 일본은 8월 23일 한국과 쿠바와의 야구 결승전을 지켜보며 대부분 한국을 응원했다. 그리고 한국이 금메달을 따내자 일본이 우승한 것처럼 기뻐했다. “일본은 노메달에 그쳤어도 한국이 금메달을 따 아시아 야구의 우수성을 보여줬다”는 게 많은 일본 야구팬들이 기뻐하는 이유였다.

언뜻 일본의 부진을 한국의 선전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야구 결승전이 끝나고 다음날이 되자 호시노JAPAN를 향한 비난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야구팬들도 올림픽과 관련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눈치였다. 오사카에서 만난 야구팬들은 아예 하루 만에 베이징 참패를 까맣게 잊은 듯 했다. 대신 그들은 한신 타이거즈의 승리에 열광했고 동네 야구부 예선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올림픽은 생활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구경기 가운데 조금 더 특별한 1경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야구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벌써부터  ‘내일은 내일의 경기가 있다’는 슬로건으로 내년 열릴 WBC를 준비하고 있다. 벌써부터 감독선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일본 도쿄돔 야구박물관에 전시된 1회 WBC 우승 기념물들. 일본은 2회 WBC를 발빠르게 준비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그렇다면 일본야구계는 어느 방향으로 자신들의 문제점을 개선해 나갈까. 일단 롤모델은 한국이다. 일본야구계는 ‘도하 참패’ 이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공인구와 스트라이크존 그리고 마운드 높이에 변화를 주며 국제대회에 맞게 자국리그를 변화해 온 걸 주목하고 있다. 일본방송에서도 하나같이 "한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KBO의 변화가 가장 크게 주효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NHK BS] 하다 신지 야구해설가는 한발 앞서  "올림픽과 WBC를 앞두고 한국처럼 리그를 중단해 대표팀의 합숙훈련기간을 늘리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며 일본야구계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이 당장 한국식 변화를 시도할지는 의문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그들만의 방식으로 야구를 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박동희의 일본리포트]는 총 10부작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다음편은 '시속 157km 도쿄특급' 야쿠르트 스왈로즈 임창용 편' 입니다.

 


이번 북경 올림픽 가운데 단연 잊을 수 없는 경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준결승의 한일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쿠바전 마지막 9회초 1사 만루에서의 절대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금메달을 딴 것은 누국나가 인정하는 우리국민 최고의 순간이었지만...
이번 한일전을 보면서 압도적으로 축구가 강했던 80년대 혹은 90년대의 축구 한일전이 생각났다.지금이야 축구에서도 일본은  쉽게 이길 수 가 없는  상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의 축구 한일전은 당연히 우리가 이겨야 하는 그런 게임이었다. 축구에 대해서 우리가 느꼈을 그런 감정을 일본은 야구에서 갖고 있었을 것이고 호시노 감독은 물론이고 일본선수들도 그런 감정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우리보다 한수 아래다" 라는  자만심이 금번 올림픽야구에서 일본이 노메달이 그친 가장 큰 패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 우리는 이상하게도 일본만 상대하게 되면 실력이상의 힘이 나온다. 물론 너무 긴장에서 축구처럼 실력에서 이겨놓고도 실제 게임에서는 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는 그렇게 부진했어도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올림픽 한일전에서 보란듯이 홈런을 때려내는 것은 단순히 실력이나 운이라고만 할 수 없는 뭔가가 분명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미가요를 그냥 듣고 있는 일본선수와 태극기에 울먹이며 애국가로 마음을 가다담는 우리의 차이라고나 할까....

2008. 8. 29. 14:23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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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가게는 큰 길에서 두어 골목 안으로 들어간, 허름한 상점가의 한가운데쯤 있었다.
출입구에는 유리문 두짝만한 간판이 나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문패 옆에 '만년필 맞춤'이라고 조그만 글씨로 씌어 있을 뿐이다.
유리문은 끔직하게도 아귀가 뒤틀려 있어 열었다가 반 듯하게 닫기까지
일주일은 걸릴 상 싶은 낡은 것이었다.
물론 소개장이 없어서는 안된다.
시간도 걸리고, 돈도 든다.
'하지만 말야, 꿈처럼 제 맘에 쏙 드는 만년필을 만들어 준다구'하고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온 것이다.

주인은 예순 살 정도, 숲 속 깊은 곳에 사는 거대한 새 같은 풍채이다.
"손을 내놔봐요."하고 그 새는 말했다.
그는 내 손가락 하나하나 그 길이와 굵기를 재고, 피부에 껴있는 기름기를 확인하고,
바늘 끝으로 손톱이 얼마나 딱딱한지도 살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남아 있는 갖가지 상처 자국을 공책에 메모한다.
그러고 보니 내 손에는 알지 못할 여러 가지 상처 자국이 얽혀 있었다.
"옷을 벗으시죠."하고 그는 짤막하게 말한다.
나는 뭐가 뭔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셔츠를 벗는다.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 찰나에, 주인은 당황하여 만류한다.
"아니, 윗도리만 벗으면 돼요."
그는 내 등 뒤로 돌아, 척추뼈를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손가락으로 더듬어 간다.
"인간이란 말씀이에요,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척추에 딱 맞는 만년필 밖에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월급이 얼마인지를 묻는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이 만년필로 대체 무얼 쓸 작정이죠, 하고 묻는다.
석달 후, 만년필은 완성되어 내게로 왔다.
꿈처럼 몸으로 쏙 스며드는 만년필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 만년필로 꿈 같은 문장을 술술 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꿈처럼 몸에 배어드는 문장을 파는 가게에서라면,
나는 바지를 벗으라 한들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년필..

만년필을 다시금 쓰고 싶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 유명한 파카부터 시작해서 몽블랑까지 써본 적이 있지만

아직도 제대로 만년필을  사용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워낙 펜 종류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요즘들어 다시금 만년필을 써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연습용으로 한자루 사기로 했다. 펠리칸....

 연습이 제대로 되면 용돈을 모아서 한자루 제대로 된 놈을 장만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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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9. 14:18

잭 티가든(Jack Tea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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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티가든은 수많은 리더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루이 암스트롱의 올스터즈 사이드 맨으로 연주한 앨범은 특히 유명하다. 한편 코넷 주자 보비 해킷과 함께 녹음한 몇 장의 공연 음반 역시 모두 완성도가 높아 나는 옛날부터 즐겨 애청하고 있다. 한 시대에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해킷의 아름답고 기품있고 매끄럽고 스윙감 넘치는 선율과 티가든의 넉넉한 인품이 배어 나오는 연주가 조화롭게 섞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음질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이야말로 음악의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데, 오늘날에는 이런 종류의 재즈에 열심히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는지,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뭐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키스 자렛 따위를 그렇게 애지중지 듣느니 차라리......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티가든과 보비 해킷이라고 하면 나는 개인적으로 LP<코스트 콘서트>(Coast Concert)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발라드 '계획을 바꿔야겠어'를 떠올린다. 1955년에 녹음된 이 앨범의 리더는 해킷이지만 이 곡에서는 티가든이 서주부에 크게 부각되어 있고, 당연한 일이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유려한 솔로를 들려준다. 우선은 인트로를 해킷이 불고 그리고 티가든이 세터로 한 소절, 이 부분이 심금을 울린다. 다음 해킷이 질소냐 하고 분발한 아름다운 코넷 한 소절, 그리고 이어 또 한명의 베테랑 트롬본 주자 에이브 링컨이 직설적으로 단호하게 한 소절, 각기 원곡의 멜로디를 지켜 소박하게 노래하는 한편 온갖 솜씨를 다 부려 즉흥 연주를 한다. 이부분이 '세상 쓴맛 단맛 다 알아버렸다'는 식으로 아주 좋습니다. 허둥지둥 아등바등하는 구석이 전혀 없다.


 이 시대의 이런 류의 연주를 들으면서 내가 가장 매력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연주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어떤 뮤지션이든 각자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점은 어떤 시대든 기본적으로 똑같다. 스타일이 없는 훌륭한 음악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킷이나 티가든의 연주는 단순히 개인의 스타일이란 수준을 넘어, '개인적인 삶의 양식'으로 가능하고 큰 역할을 한다. 티가든의 노래하듯 속삭이는 독특한 음색과 연주에 귀기울여보라. 오늘날 이렇듯 다정다감한 재즈는 그 모습을 철저하게 감춰버리고 만 듯하다.

 

 이 레코드는 캐피털 사가 <딕시랜드 재즈 페스티벌> 때문에 서해안을 방문한 해킷을 스튜디오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모인 뮤지션 중에서 마음에 드는 멤버와 함께 연주하고 싶은 곡을 마음껏 연주하도록 한 배려 속에서 밤을 새워가며 녹음한 것이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모이면 아무리 개성이 강한 '개인주의자' 들이라도, 정말이지 멋지게, 그리고 조화롭게 일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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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9. 14:16

Jimmy Rushing

Jimmy Ru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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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사스 시티 시대부터 오랜 세월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간판 스타(중 한명)로 일한 지미 러싱이 독립하자 카운트 베이시는 전속 가수를 몇 명 고용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조 윌리엄스가 가장 실력 있고 유명했지만, 그런 그조차 '젊은 가수의 대역"같은 인상을 오래도록 떨치지 못했다. 안된 얘기지만, 그 정도로 지미 러싱의 존재의 비중이 컷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매트 데니스나 보비 툴프와 같은 '상큼형' 남성 가수를 좋아하여 러싱 같은 '끈적끈적형'을 별로 열심히 듣지 않는데, 그래도 러싱의 가창에는 취향을 넘어선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어서 들을 때마다 "아, 좋다"하고 순순히 감탄하고 수긍한다.
  그에 관한 글들을 이리저리 들추어보니, 인간적으로는 개성이 너무 강해 문제성이 있는 아저씨였던 것 같은데, 하기야 그 정도 박력이 없으면 이만큼 파워풀한 노래는 부르지 못할 것이다. 앰프의 성능이 아직 불안정했던 시대에 거의 폭력적일 만큼 강력한 음을 쏟아내는 빅밴드와 한 무대에서 음량을 겨루어야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근성이 아니고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같은 블루스 오리엔티드 싱어이지만, 스마트하고 도회적인 감성의 신세대 가수 조 윌리웜스에게는 그런 '캔사스 아저씨, 뽕짝 파워' 같은 박력은 없었으니(대체로 없는 것이 보통이다), 내기를 하자면 이길 가망이 없다.
 러싱은 어떤 시기의 레코드를 틀어도 러싱이 아니면 그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기운차고 유일무이한 노래를 들려주는데, 역시 속내를 서로 아는 베이시 악단의 토박이 연주에 맞춰 노래할 때가 가장 마음 편히 스윙하는 때인 것 같다. 시작부터 "이 악단이야 내가 속속 다 알고 있지" 하는 식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깊이가 있다. 그리고 싫든 좋든 거기에는 저 그리운 캔사스 시티의 메마른 기풍이 배어 있다.
  베이시 악단에서 독립한 후의 앨범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Jazz Odyssey"와 "Little Jimmy Rushing and Big Brass"와 같은 컬럼비아 판인데, 특히 후자는 여느 때의 베이시의 동창생에다가 콜맨 호킨스, 빅 디킨슨 등의 호화로운 손님이 합세하여, 부드러운 스윙감을 만끽하게 한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러싱의 목소리에서 전성기의 신축성을 기대하기는 과연 어려워지지만, 반대로 차분하게 집중하여 설득력있는 노래를 부른다. 나이가 들어 이야기의 속도나 감칠맛은 다소 쇠퇴했으나, 인정미 넘치는 이야기는 능숙한 이야기꾼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러싱은 죽을 때까지 늘 부지런한 현역이었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키가 작기로도 유명했으나, 오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타인에게 약점을 잡히느니 차라리 분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급사했을지도 모른다. 옛날 이야기가 나오는 어떤 난쟁이처럼.
 내트 피어스가 편곡한 "June Night"나 벅 클레이튼이 편곡한 "Jimmy's Blues"를 들으면, 일일이 까다로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재즈가 충분히 스릴 있고 영웅적이었던 시대의 공기가 절절하게 되살아난다
.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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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ly Manne

Shelly M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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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셸리 맨은 어느 모로 보나 드럼의 달변가이다. 그러나 절대로 수다쟁이는 아니다. 언변이 좋으나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미묘한 구분을 분명하게 하는 데에 그의 음악가로서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가게에 비유하면, 맛깔난 안주를 조그만 접시에 담아 차례차례 내놓는 술집과 같다. 안주는 어느 것이나 보기 좋고 세련되고 나름의 철학이 있다. 술집 아저씨도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고 성가시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일이 없고, 손님의 안색을 살피면서 임기웅변적으로 안주를 안배한다. 가격은 결코 비싸지 않지만, 내용을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건너편 '맥스 로치'의 가게처럼 아저씨가 무뚝뚝하고 가게 안의 조명은 어두컴컴하고, "맛만 좋으면 돼. 잠자코 먹고 마시고, 다 먹었으면 잽싸게 꺼지라구. 구질구질한 공사치는 필요없으니까"라는 식의 하드한 부분이 없다. 그러니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재즈를 듣기 시작하면서, 셸리 맨의 "My Fair Lady"에 푹 빠져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 곡만 들었다. 애드립까지 송두리째 외웠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셸리 맨만큼은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감히 말하건대, 컨템퍼러리에서 나온 그의 리더 앨범은 어느 것이든지 다 신난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라이브 녹음이 좋다.
  이런 말을 하면, 드럼에 관한 한, 흑인지상주의자가 대부분인 일본의 팬들이 눈살을 찌푸릴 듯한데, 그렇다고 세상의 술집이 모두 '맥스 로치 가게' 같다면 좀 피곤해지지 않을까. 나는 로치도 블래키도 좋아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나는 셸리 맨의 세련된 취향과 달변이면서도 간결하고 멜로디컬한 드러밍에 자극을 받은 미국 서해안의 뮤지션들이 평소보다 한결 더 뜨겁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듣는)것이 좋다. 그 온도치를 피부로 느끼는 것은 웬만한 기쁨이다.
  로스 맥도널드는 이렇게 썼다. "캘리포니아의 사계절이 없어서 재미없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계절이 분명하게 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과연 명언이다.
  셸리 맨의 앨범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Shelly Manna & Hits Men at the Black Hawk"이다(네 장짜리 세트인데, 미발표곡을 모은 5집이 최근 CD로 나왔다). 이 라이브 음반의 열기는 무척이나 스릴 있고 듣는 보람이 있다. 앞줄에 배치된 드럼펫의 조 고든과 테너 색소폰의 리치 카뮤카가 미소가 절로 감돌게 하는 수수하고도 견실한 솔로를 들려주고, 피아노의 빅터 펠드맨도 (때로는 시끄럽기만 하지만) 곳곳에서 세련된 맛을 낸다. 리더인 셸리 맨은 철저하게 뒤에서, 열심히 온갖 '안주'를 내놓으면서 등뒤에서 모두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후려친다. 같은 시대의 동해안에서 활동한 흑인 밴드의 육중한 음향에 비하면 "정념이 희박하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것이 재즈란 음악이 준 기쁨의 하나가 아니라면, 나는 재즈 따위는 듣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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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 Krupa

 Gene Kru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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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크루파란 이름은 베니 굿맨 악단에서 연주한 "Sing Sing Sing"의 솔로를 머리에 떠오르게 하고 자칫 "좀 참아주시지"하는 기분을 들게 하지만, 굿맨이 남긴 전성기의 레코드를 찬찬히 들어보면 그렇게 화려한 드러밍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이며 평소의 크루파는 리듬섹션의 일원으로 성실하고 장인 기질의 연주로 일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테니 윌슨, 굿맨과 함께 한 트리오와 거기에 라이오넬 햄프턴이 가세한 오중주단에서의 크루파의 역할은 베이스 주자가 없는 그룹을 위하여 부드럽고 견실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의 드럼은 그 직무를 충분히 다했다. 그가 두드리는 '싱글벙글 비트'에서 뼈속까지 뒤흔드는 듯한 밀도 높은 신명감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당시 흑인 드러머들의 소박한 스윙을 백인 청중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번역한' 그의 컨셉은 프랙티컬하고 진취적 기상이 넘쳤으며 지적이기도 했다. 특히 뛰어난 청력, 예민한 신경 등의 그의 각별한 특질은 그의 뒤를 이은 백인 드러머들의 스타일을 기본적으로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윌슨, 햄프턴 같은 흑인 뮤지션과 스몰 밴드에서 그저 무심하게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즐기는 굿맨 어르신 사이에서, 백인 밴드--- 기본적으로는 시카고 재즈이다 ---의 닻을 정해진 장소에 던지고 위치가 어긋나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은 역시 크루파의 흐트러짐없는 비트였으며, 그것은 음악적인 급소라고 해도 지장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화려한 드럼 솔로를 일약 유명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듬 메이커인 크루파의 값어치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크루파는 그런 굿맨 시대의 화려한 이미지로 낙인이 찍혀 독립을 하고서는 긴긴 세월 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크루파의 대표적 드럼 연주를 들으려고 한다면, 1930년대 굿맨 시대의 레코드를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가 굿맨 악단을 떠난 후에 조직한 빅 밴드도 상당히 신선하고 들을 만한 보람이 있다. 특히 1946년에서 57년 사이에, 당시 열아홉 살 제리 멀리건의 편곡으로 녹음한 "How High the Moon"과 "Disc Jockey Jump"와 같은 히트 곡에는 희미하게나마 팝의 내음마저 풍겨 지금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드럼도 적확하게 밴드를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12년 후에 크루파는 멀리건이 남긴 악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버브에서 다시 음반을 내게 되었는데, 그런 종류의 기획치고는 의외로 재미가 있다. 오리지널 연주의 거친 면은 사라졌지만, 에디 버트, 카이 윈딩, 필 우주 등의 신세대 뮤지션의 옛 악보에 새로운 사운드로 솜씨 좋게 숨을 불어넣고 쏠쏠하다. 멀리건 자신도 "나의 스타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옛날 곡이라서, 기획 얘기를 듣고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하고 걱정했는데, 막상 들어보니 상당히 좋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약관 열아홉 살에 무명인 멀리건의 재능을 간파하고 등용하여 밴드의 어렌지를 송두리째 맡긴 밴드 리더 크루파의 도량이랄까 모험 정신에도 재삼 경의 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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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onel Hampton

 Lionel Hamp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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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한 지 오래지 않아 게리 버턴은 당시 비브라폰 주자로 절정에 있었던 밀트 잭슨을 비판했다가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그는 훗날 씁쓸하게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때 절감했다. 주류를 가볍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밀트 잭슨이 데뷔할 당시, 비브라폰 주자로서 재즈계에서 군림했던 뮤지션은 라이오넬 햄프턴이었다. 아니 비브라폰이라는 악기를 재즈에 도입하여 기본적인 주법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햄프턴이었고 이미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밀트 잭슨은 그 거대한 선구자의 스타일을 파괴하고 자신의 새로운 이디엄을 명료하게 제시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밥 무브먼트 그리고 MJQ는 그의 유효한 무기가 되었다.
  그렇게 보면 햄프턴에서 잭슨으로 그리고 버턴으로 이어지는 비브라폰 주자의 역사적 추이는 다른 악기의 완만하고 집단적이며 대하적(大河的)인 계승성에 비해 개인간의 개성의 대비와 갈등이 보다 더 선연하다. 연주자의 절대수가 적은 마이너 악기인 만큼 일인일당(一人一堂)의 요소가 짙고 늘 고독한 긴장감이 강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옛날부터 비브라폰이란 악기를 좋아했다.
  헴프턴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스윙 밴드 시대의 발랄한 연주는 높이 평가받았으나, 전후에는 "그저 멋들어지게 노래할 뿐 아닌가", "지나치게 CM으로 흘렀다"는 이유로 평론가들 사이에서 홀대를 받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노만 그랜츠 Clef-Norgran 레이블로 녹음한 일연의 스몰 캄보 연주(백은 오스카 피터슨, 레이 브라운, 버디 리치 등 예의 그랜츠 악단의 "무엇이든 좋아요'의 리듬 섹션)가 마음에 들어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일이 많은데, 이 레코드들도 세상 사람들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리지 않는다.
  하기야 이 무렵의 햄프턴의 음악에서는 혁신성이 거의 사라져서 어떤 곡을 들어도 대개 비슷하다. "뜨뜻미지근하다"고 표현한다면 반박할 말도 없었지만...... 그러나 타악기 비브라폰의 본질적인 특성으르 낙천적이고도 명쾌하게 전면에 부각시킨 햄프턴의 연주 스타일은 나름대로 바람직하고 들어서 기분이 좋다. 뜨뜻미진근할지도 모르겠으나, 회고에 물들지 않고 또 시류에 휩싸이는 일도 없다. 늘 하나의 완결된 언어가 있고, 그것은 보수나 혁신과는 다른 차원이므로 좀더 평가받아도 좋지 않을까? 오늘날에, 시대와 함께 비참하게 바람처럼 사라져간 무수한 '혁신성'의 과연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닐까?
  주안점을 '신난다'는 데에 둔다면, 나는 임펄스의 "You Better Know It!!!"를 좋아한다. 1964년에 녹음한 앨범인데, 클라크 테리, 벤 웹스터, 같은 베테랑이 전열에 진을 치고 오랜만에 마음껏 스윙한다. 행크 존스도 좋다. 연주의 질도 높고 의욕도 충분하고, 신기하게도 퇴보적인 느낌은 전혀 없다. 요즘은 이렇게 "저력있는 어른들의 놀이" 같은 앨범을 별로 볼 수 없다. 신나고 아주 좋은데
.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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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 Callo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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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r Cab Calloway at the Cotton Club on New Year's Eve.
 
 

Cab Calloway

 
  캡 캘러웨이 하면 존 랜디스가 감독한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1980)에서의, 저 기괴한 노래 '하이 디 호'가 저절로 떠오른다.<블루스 브라더스>는 존 랜디스가 흑인 음악 문화에 바친 컬러풀하고 와일드한 오마주인데, 그 영화의 수줍음 많고 몽상적인 소년의 상념 같은 것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 나는 그 점을 상당히 좋아하였다. 특히 레이 찰스와 캡 캘러웨이가 화면 가득 어필하는 음악 신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들이 발산하는 소름끼칠 정도로 원초적이고 고유한 에너지는 이 영화에 담겨 있는 메시지의 차원을 두 단계 정도 끌어 올려놓고 있다.
  또 작곡가 조지 거쉰 그의 포크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에서 캡 캘러웨이를 모델로 한 '스포팅 라이프'란 유니크한 등장 인물을 설정하여 그 역을 캡 캘러웨이 자신이 연기하도록 하였다. 이쯤 되면 캡 캘러웨이란 인물이 지니고 있는 특이함은 시대를 초월하고 음악 스타일을 초월하여 일종의 전설이 될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가 실체이고 어디까지가 반복된 이미지인지 그것조차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재즈 음악의 역사 속에서 캡 캘러웨이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가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엽이라는 점에 대해서 세인들은 대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수준 높은 빅 밴드를 이끌고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수많은 음반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팬들 사이에 <고양이 추 베리>라 불리고 있는 에픽 사의 LP다(이 레코드는 일본에서 편집된 것인데 내용이 오리지널보다 훨씬 좋다)
  이 앨범은 1940년을 전후하여 테너 색소폰 주자 레온 추 베리가 연주한 곡들을 모아 놓은 것은데, A면은 추 베리 자신의 밴드 연주 B면은 그가 솔로이스트로 연주한 캡 캘러웨이 악단의 연주이다. 당시의 캡 캘로웨이 악단에는 추 베리 외에도 디지 길레스피, 타일리 글렌, 밀트 힌턴 등 젊고 활기찬 뮤지션들이 있었고, 그들은 부드럽고 발랄한 음악성을 지닌 리더와는 달리 무대 위에서 과격한 솔로를 펼쳐주었다. 캘러웨이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범하게, '나머지는 젊은 사람들이 기량껏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되지'하고 대처하는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원숙한 스윙에서 비밥의 발아기로 서서히 이행하는 시대의 숨결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특히 추 베리는 그야말로 기름기가 잘잘 흐를 만큼 원숙하고 신선한 연주를 들려준다. 이 역시 캘러웨이란 사람의 넉넉한 됨됨이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만 들어봐도 그의 그런 인간성이 은연중에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넉넉한 성품의 캘러웨이조차도 '신세대' 뮤지션인 길레스피하고만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비꼬일 대로 꼬여, 결국에는 길레스피가 나이프를 들고 캘러웨이에게 달려드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블루스 브라더스>를 보고 잇으면 세월의 흐름 같은 것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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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s Waller

 Fats Wa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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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팻츠 월러가 작곡한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 중에서도 특히 '지터벅 왈츠'(Jitterbug Waltz)를 좋아한다.
  먼 옛날, 1940년대 초엽에 작곡된 오래된 곡인데, 흐물흐물 올라 갔다 내려갔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색다른 음형의 멜로디에다가 어째 기묘한 코드 진행에, 음악으로서 새로운 것인지 낡아빠진 것인지, 단순한 것인지 복잡한 것인지, 성실한 것인지 불성실한 것인지,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해진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이상하게도 귀에 오래 남는 곡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부억에서 ' 띠, 라리라리라리라......' 하고 흥얼거리 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개인적이고 편협한 감상일 뿐 보편성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곡을 듣다 보면, 그 옛날 어디선가 본 아득한 광경이 불현듯 되살아날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느긋한 멜로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만 같다.
  묘한 비교일지도 모르겠으나 도어스의 에서 레이 만자렉이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저 인상적인 인트로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문득문득 '지터벅 왈츠'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잘 들어보면 전혀 다른 음악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의뭉스럽고 유니크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푸근한 필링 때문에 원초적으로 서로 상통하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으음, '원초적 풍경'이라고 하면 어떨까. 심각한 표정의 가면을 쓴 어릿광대성, 어릿광대 가면을 쓴 심각성. 좀더 확대시키면, 애거드 앨런 포우나 쿠르트 바일의 세계와 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까지 비약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이 곡은 월러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 레코드도 열심히 들었지만, 다른 연주자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연주가 더러 있었다. 풍류객 미셀 르브랑의 <르브랑 재즈>에 들어 있는 냉철하고 깔끔한 해석도 멋지지만 개인적으로는 백인 알토 색소폰 주자인 허브 겔러의 수수한 명반 <파이어 인 더 웨스트>(Fire in the West) 쪽을 즐겨 들었다.
  서해안 단골 뮤지션들과 그때 마침 동해안에서 온 케니 도햄과 레이 브라운이 함게 연주하였는데, 이 앨범에서는 특히 도햄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언뜻 듣기에는 대단한 연주 같지도 않은데, 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짜릿한 흑인 재주가 된다. 신기한 일이다. 도햄이란 사람한테는 원래 그런 음악적인 인덕이 있는 모양이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2루수. 무심히 던지는 볼이 마니아들을 열광케 한다.
  느긋하고 푸근한 분위기면서도 재즈의 정신을 절감케 하는 멋들어진 셰션으로, '지터벅 왈츠' 원곡의 악상도 아주 잘 살려내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레코드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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