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8. 14:13

빌 에반스(Bill Ev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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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가 지닌 자질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이 피아노 트리오란 포맷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음은 세인의 공통된 의견이다. 범위를 좀더 한정한다면, 스코트 라파로가 베이스를 연주한 피아노 트리오가 될 것이다. 앨범으로 하면 <포트레이트 인 재즈>(Portrait in Jazz),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 <선데이 앳 빌리지 뱅가드>(Sunday at Village vanguard), <익스플로레이션>(Exploration). 이렇게 네장이다. 이런 앨범을 녹음하고 제작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리버 사이드라는 레코드 회사는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앨범들 속에서 에반스의 연주는 너무나 훌륭하다. 우리들은 인간의 자아가 (그것도 상당한 문제를 껴안고 있는 자아가) 재능이란 여과 장치를 통과하면서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땅으로 톡톡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 복잡하고 정교하며 치밀한 여과 장치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또 그 내향성을 상대화하고 활성화하고 있는 것이 스코트 라파로의 봄날처럼 싱그럽고 숲처럼 깊은 베이스 연주다.

 

 그 신선한 숨결은 우리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세속적인 영역을 소리없이 해제하고 그 깊은 곳에 잠겨 있는 혼을 일깨운다. 이 시점에서 에반스 없는 라파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라파로 없는 에반스 또한 존재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적적인 해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의 에반스를 정의하는 기본적인 틀이었던 밥 이디엄이 실로 어이없이 해체되고, 새로운 지평선이 그 앞에 -- 그리고 우리들 앞에 -- 출현한다. 낡은 옷을 벗고 우리들은 해방된다. 우리들의 피부는 새로운 색을 획득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새로운 세포를 획득한다. 거기에는 불합리할 정도로 뜨거운 열의 발산이 있다. 세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세계를 날카롭게 도려내는 마음이 있다.  
 
 스코트 라파로의 너무 이른 죽음(1961)으로 두 사람의 그 멋진 인터 플레이는 유감스럽게도 몇 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에반스의 완벽주의로 인하여 결국 남겨진 녹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라파로가 죽은 후, 에반스는 레귤러 베이시스트를 몇 명 맞이하였지만 라파로와 함께 빚어냈던 자발적인 독창성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물론 에반스는 그 후에도 몇몇 탁월한 연주를 남겼지만, 라파로 이후 '자아의 상대화'를 통한 보다 새로운 지평을 재즈 팬 앞에 제시하지는 못했다. 섬세하고 내향적인 자질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지만, 과거 그의 음악을 뜨겁게 해주었던 열의 발산은 사라지고 없었다. 잃어버린 단 한 번의 숙명적인 사랑처럼.
 
 앨범 <왈츠 포 데비>는 CD말고, 옛날처럼 몸을 사용하여 LP로 듣는 것이 좋다. 이 앨범은 한면에 세 곡이 들어 있는데, 한 면이 끝나면 일단 바늘을 들고 물리적으로 한숨을 돌려야 비로소 본래의 <왈츠 포 데비>라는 작품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모든 트랙이 다 멋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마이 풀리시 하트'(My Foolish Heart). 달콤한 곡이다. 이렇게까지 몸에 파고들면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Bill Evans
Waltz for Debby


Date of Release Jun 25, 1961 (recording) inprint

Bill Evans - Piano
Scott LaFaro - Bass
Paul Motian - Dru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