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9. 10:21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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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허망한 영위일지라도 궁극을 따져보면 그 나름의 고유한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머셋 몸이 말했듯, '면도칼에도 철학은 있는' 것이다.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에도 물론 철학이 부수된다. 그것은 바로,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큰 소리로 듣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창한 철학은 아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진실이다. 왜냐하면 카운트 베이시가 빚어내는 음악에 담겨 있는 가장 훌륭한 특질은 그 음악적 '풍압'에 있기 때문이다. 스피커 앞에 앉아서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음악을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날아갈 뼌했다면(불과 몇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미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셈이 된다. 그리고 그 풍압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소리를 크게 하는 편이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은 소리가 큰 악단'이란 말과 같은 뜻은 아니다. 카운트 베이시 악단보다 음향적으로 박력있는 물리적으로 큰소리를 내는 빅 밴드는 그밖에도 많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진정 탁월한 부분은 그 소.리.의. 작.음.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정성스럽고 조그만 소리를 쌓아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작은 음을 사용하여 듣는 이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스윙을 들려주는, 마치 쾌할한 고문자처럼......, 가만히 앉아 주의깊게 들어보면 그 놀라운 솜씨에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정이 동으로 전환되어, 브라스 밴드가 거침없이 와일드하게 포효할 때 우리들은 낙차의 다이너미즘에 뒤로 나자빠지고 마는 것이다. 튕겨나가는 것이다. 작은 소리든 큰소리든 진지하고 대담하게 스윙하는 재주만큼은 다른 어떤 밴드도 흉내내지 못한다. 그 밴드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탁월하다 해도, 캔자스 시티에서 온 윌리엄 베이시(카운트 베이시의 본명) 씨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버브 사에서 나온 '베이시 인 런던'(Baise in London)이다. 카운트 베이시는 라이브를 녹음한 멋진 앨범이 몇 장 있는데, 아무튼 신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는 이 레코드 한 장이면 그만이다. 그 옛날의 재즈 뮤지션의 상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몸에 나쁠 정도'로 스윙하는 연주다. 너무 여러 번 말해서 집요하다 싶은 감이 있지만, 볼륨을 가능한  한 크게 올리고 듣는 편이 좋다. 연주는 첫 시작부터 끝까지 나무랄 데가 없는데, 특히 LP A면에 들어 있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여섯 곡의 박력은 압권이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다. 곡은 '샤이닝 스타킹'(Shiny Stocking)에서 '하우 하이 더 문'(How High the Moon)으로 옮겨 간다. 이리니저리니 골치 아픈 말 떠들 필요없이, 캔 맥주 하나 손에 들고서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스테레오의 볼륨을 한 껏 올려 소리의 홍수 속에 몸을 맡기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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